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화단 운동 (문단 편집) == 종결 이후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0kn47m2ryo571.jpg|width=100%]]}}}|| || 제국주의: 중국, 미국 독수리가 뒤에서 보는 와중 유럽 열강들과 일본이 의화단 운동 후 중국을 분할하려 한다, 1900[* 왼쪽 위 부터 미국 흰머리수리, 러시아 곰, 프랑스 수탉, 독일 검독수리, 영국 사자, 이탈리아 늑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쌍두 독수리, 청나라 용, 그리고 일본 표범이다.][* 열강들이 청나라를 상대로 싸울때는 힘을 합쳤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누가 더 많이 영토와 자원을 가져갈지 으르렁거리며 싸운다는 뜻이다.] || [[청나라]]는 이 전쟁의 패전으로 열강들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였다. 특히 [[신축조약]]의 결과로 사건에 관여한 열강 11개국[* 직접 참전하여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8개국과 의화단에게 피해를 입은 3개국(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에게 백은 9억 8천만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액을 지급하게 되었다. 4억 5천만 냥에 연이율 4%로 39년 분납 조건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11년치 재정과 맞먹는다. 현 가치로는 300억 정도이며 배상금은 [[중화인민공화국]] 때 청산했지만 공산 진영([[소련]], [[동독]], [[헝가리 인민 공화국|헝가리]])에만 지불했다. 더불어 [[베이징]]을 지키는 최종 방어선인 [[톈진]] 대고구의 포대를 해체하고 코앞 베이징~[[산해관]]까지 연합군 군대가 주둔하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청나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곳은 제1차, 2차 아편전쟁에서 활약했던 포대였다. 특히 2차에서는 당시 최강이었던 서양 함대를 박살낸 전력이 있는 대단한 포대였는데 이를 해체했으니 수도 베이징 방어가 부실해져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인천광역시]]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해안포를 모조리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비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특히 '주술로 총을 막으려고 한' 의화단의 이미지는 중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며 서양 열강의 조롱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 '덩치만 큰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겨지던 풍조가 이때 완전히 고착되었다. 그나마 중국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점은 러시아를 제외한 열강들은 경제적 이득을 노렸지 영토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령 인도는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영국의 인도 지배는 100년 이상 원래 동인도 회사가 벵골 태수를 얼굴마담으로 삼다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무늬만 남았던 [[무굴 제국]]을 해체하고 수십 개 인도 번왕국을 병립시켜 영국령이 아닌 인도 제국령으로 간접통치했고 평상시 영국군 정규군과 관료들의 숫자는 수천이 넘지 않았다. 즉 대부분의 식민지 주둔군은 현지 병력이었다.[* 이는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동아시아 통치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영국이 인도를 용이하게 통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 제국을 설립하는 것도 논란이 많았고 의화단 운동 시점에도 영국이 과연 다음 세기에도 과거처럼 인도를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회의적이었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식민지를 착취해서 노예무역하고 귀금속을 탈취하던 시대가 아니라 이미 제국주의도 자본주의화라 식민지를 교육하고 발전시켜야 이익이 나는데 그럴수록 식민지에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통치비용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식민지 확보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가령 스페인과 전쟁 후 전리품으로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필리핀을 얻었지만 쿠바와 필리핀은 즉시 독립시키겠다고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경우 공화당 내 인종차별적인 고립주의자들이 야만인들을 자국의 세금으로 먹여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포기할 것을 종용할 정도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열강들과 달리 미국은 본토에도 미개척지가 상당부분 남아 있을 정도로 가진 영토가 많았다. 때문에 해외 영토 개척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광활한 영토에는 세계 최대 매장량과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애팔래치아의 탄전, 20세기 초반에 전세계 생산량 50% 이상을 차지한 텍사스의 유전, 캘리포니아의 금광산, 오대호 지방의 엄청난 수자원과 대륙 중부 대평원의 농업지대가 있었다. 이미 미국은 자원부국이었고 20세기 초반 식민지 없이도 미국의 경제력은 최대의 식민제국 영국을 두 배 이상 추월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의 영토와 자원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1840년대 아편전쟁 이전부터 임칙서 같은 인물들이 구미 열강들이 영토보다는 교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홍장도 1870년대 조선 조정에 영미는 교역이익만 추구해서 위험하지 않으니 이들과 수교하여 러시아를 견제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직접적으로 일리 지방에서 충돌하여 신강 지역을 일부 가져갔고 2차 아편전쟁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통째로 할양받았다. 그리고 만주 몽골 횡단 철도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가져가고 뤼순항을 조차하는 등 만주와 몽골 전체를 영향권 하에 넣기 위해 노골적으로 청 조정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미가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하는 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작전을 폈다. 한편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지식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잡았다. 지식층은 서구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 들이는한편 사실상 서구 제국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린 만주족의 청 조정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커졌다. 이 시기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는 밑바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